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철인들이 등장하여 저마다의 사상과 철학을 주장하였는데, 이들을 지칭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 극단적 주장을 하여 대비되는 인물로는 양자(楊子, 楊朱)와 묵자(墨子, 墨翟)를 들 수 있다. 수많은 나라들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을 벌이던 시대에 제자백가가 저마다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 가운데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를 이어 유가의 사상체계를 세운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는 양자와 묵자 그리고 전국시대 노나라의 현자인 자막(子莫)을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양자(揚子)는 자신을 위함을 취하였으니, 하나의 털을 뽑아서 천하가 이롭더라도 하지 않았다. 묵자(墨子)는 겸애(兼愛)를 하였으니, 이마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더라도 천하에 이로우면 하였다. 자막(子莫)은 이 중간을 잡았으니, 중간을 잡는 것이 도(道)에 가까우나, 중간을 잡고 저울질함이 없는 것은 한쪽을 잡는 것과 같다. 한쪽을 잡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도(道)를 해치기 때문이니, 하나를 들고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다.”(『맹자』 진심장구상 26)
요즘말로 표현한다면 양자(揚子)는 이기주의(利己主義)로서 한 극단이고 묵자(墨子)는 이타주의(利他主義)로서 한 극단에 자리한다. 그런데 자막(子莫)은 극단적 이기주의도 아니고 극단적 이타주의도 아닌 중도를 표방하였으니 중간을 잡았다고 하여 도에 가깝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간을 잡고 저울질함이 없는 것은 그 또한 한 극단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무리 중도를 표방하더라도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균형을 잡지 않고, 단지 그 중간을 잡고 다른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도를 해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그리고 이들 양 극단 사이에서 중도를 표방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내세우며 결집을 꾀하는 세력이 속속 일어나고 있다. 단지 기존의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와는 달리 중도적 가치를 주장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결국 중간을 잡거나 새로운 가치를 잡는 것에 불과한 또 하나의 극단일 뿐이다. 중간을 잡고 저울질함이 없는 ‘집중무권(執中無權)’이 아니라 중간을 잡으면서 저울질함이 있는 ‘집중유권(執中有權)’을 해야 양 극단을 아우를 수 있는 역량과 세를 결집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권(權)은 권력(權力)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과 형평을 도모하기 위하여 저울질하는 추를 의미한다.
춘추시대에 공자가 주유천하를 하면서 이상사회를 추구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맹자 역시 패권다툼에 유혈이 낭자했던 전국시대에 왕도정치를 주장하면서 이상사회를 꿈꿨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맹자가 주장했던 ‘집중유권’의 정치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선거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2020년 총선은 전국시대(戰國時代)와 같은 혼돈이 예견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정치사상 커다란 변화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수와 진보가 저마다 지향하는 가치는 빛이 바래고 중도가 지향하는 가치는 나약하기만 하다. 진정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민을 이용하면서 모든 정치집단들이 저마다의 세력화에 목숨을 거는 총선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맹자가 주장했던 ‘집중유권(執中有權)’의 정당 혹은 정치세력이 나올 수 있을까? 여기에 더 나아가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당 혹은 정치세력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2020년 대한민국의 정치를 저울질해 본다.
孟子曰 楊子는 取爲我하니 拔一毛而利天下라도 不爲也하니라 墨子는 兼愛하니 摩頂放踵이라도 利天下인댄 爲之하니라 子莫은 執中하니 執中이 爲近之나 執中無權이 猶執一也니라 所惡執一者는 爲其賊道也니 擧一而廢百也니라.(『맹자』 盡心章句上 26)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양자(揚子)는 자신을 위함을 취하였으니, 하나의 털을 뽑아서 천하가 이롭더라도 하지 않았다. 묵자(墨子)는 겸애(兼愛)를 하였으니, 이마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더라도 천하에 이로우면 하였다. 자막(子莫)은 이 중간을 잡았으니, 중간을 잡는 것이 도(道)에 가까우나, 중간을 잡고 저울질함이 없는 것은 한쪽을 잡는 것과 같다. 한쪽을 잡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도(道)를 해치기 때문이니, 하나를 들고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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