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내경(黃帝內經)』(Yellow Emperor's Canon of Medicine)은 동북아권의 고대 의서(醫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소문(素問)」과 「영추(靈樞)」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 9권 81편으로 되어 있어 합치면 모두 18권 16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인간의 건강과 의학에 관한 문제를 천기(天氣)와 지기(地氣) 그리고 인기(人氣)의 상관관계 속에서 논하고 있으며, 그 형식은 마치 공자(孔子)와 제자들 간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는 『논어(論語)』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등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는 『국가론 Poliiteiā 』과 유사하게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와 기백(岐伯) · 뇌공(雷公) 귀유구(鬼臾區) 등의 여섯 신하와의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다. 『황제내경』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서 한대(漢代)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거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수정 증보되면서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동양의 전통적 사유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기운, 즉 천기(天氣)와 지기(地氣) 그리고 인기(人氣)는 상호간에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천기(天氣)와 지기(地氣)의 상호작용으로 기후(氣候)와 기상(氣象) 작용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인간의 건강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는 ‘천지인상응론(天地人相應論)’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천지인상응론’에 또 하나의 전통적 사유의 핵심이론인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이 결합되어 고대 의학의 이론적 체계를 세운 것이 『황제내경』이다.
『황제내경』에서 논하고 있는 천기(天氣)와 지기(地氣) 그리고 인기(人氣)란 무엇인가? 「소문(素問)」 제69편 ‘기교변대론(氣交變大論)’에는 황제와 기백의 문답을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황제 가로되, “내가 듣기를, ‘마땅한 사람을 얻고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도리(道理)를 잃은 것이고, 마땅하지 않은 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늘의 지보(至寶)를 함부로 누설하는 것이다.’라고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덕이 없어 지극한 도를 전수 받기에 부족하나, 백성들이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왔습니다. 그대에게 청하건대, 무궁(無窮)토록 보존하고 무극(無極)토록 전수하여, 내가 그 일을 맡아 법으로 삼아 행하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기백 가로되, “청컨대 제가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경(上經)》에 이르길 ‘무릇 도(道)에 정통한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알며, 가운데로는 인사(人事)를 알아야 가히 장구(長久)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황제 가로되, “무슨 뜻입니까?”
기백 가로되, “기(氣)에 근거하여 위치를 정한 것입니다. 하늘에 자리한 것은 천문(天文)이고, 땅에 자리한 것은 지리(地理)이며, 사람 기(氣)의 변화에 통달하는 것을 인사(人事)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운기(運氣)가 태과(太過)하면 기후가 계절보다 먼저 이르고, 불급(不及)하면 기후가 계절보다 늦게 이르게 되니, 천기와 지기가 다스리고 화하여 사람이 그 천기 지기에 응하는 것입니다.”
帝曰 余聞호대 得其人하여 不敎면 是爲失道라하고 傳非其人이면 慢泄天寶라하니 余誠菲德하여 未足以受至道라 然이나 而衆子哀其不終이라 願夫子컨대 保於無窮하고 流於無極토록 余司其事하여 則而行之하곤 奈何잇고?
岐伯曰 請컨대 遂言之也니이다. 《上經》曰夫道者는 上知天文하고 下知地理하며 中知人事하면 可以長久라하니 此之謂也니이다.
帝曰 何謂也오?
岐伯曰 本氣位也니이다. 位天者는 天文也요 位地者는 地理也요 通于人氣之變化者는 人事也니 故로 太過者는 先天하고 不及者는 後天하니 所謂治化而人應之也니이다.
이 문장의 핵심은 의도(醫道)를 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사에 통해야 하는데, 천문을 통하여 천기(天氣)의 흐름을 관찰하고 지리를 통하여 지기(地氣)의 흐름을 관찰해야 하며 이를 통해 사람의 기운이 천기 지기에 응하는 상관관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한 것이 「소문」에 7편으로 정리된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이다).
천문과 지리 및 인사를 통하여 천기와 지기 그리고 인기를 파악한다고 하였는데, 고대인들이 천기와 지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단지 막연한 관념과 추론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천문과 지리에 대한 실질적인 관찰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황제내경소문』에 있는 대표적인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소문」 67편 오운행대론(五運行大論)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기백(岐伯) 가로되, “천지(天地)의 동정(動靜)과 오운(五運)의 천복(遷復)에 대해서 귀유구(鬼臾區)는 훌륭히 관찰하기는 했으나, 두루 밝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무릇 변화의 작용은 하늘은 상(象, 星象)을 드리우고, 땅은 (만물의) 형체를 이룹니다. 칠요(七曜, 日月과 金木水火土의 五星)는 하늘(우주)에서 오른쪽으로 운행하며, 오행(五行)은 땅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땅(지구)이라는 것은 (오행으로) 생성된 형체의 만물을 싣고 있으며, 우주(虛)라는 것은 하늘의 정기(精氣)에 응하여 (일월성신이) 분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형(形, 땅에 있는 만물)과 정(精, 하늘에 있는 日月星辰)의 움직임은 마치 근본(根本, 뿌리)과 지엽(枝葉, 가지와 잎)의 관계와 같아서, 우러러 그 상(象, 하늘의 일월성신)을 관찰하면 비록 아득하게 멀리 있더라도 (천지의 동정과 오행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황제 가로되, “땅(지구)은 (사람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기백 가로되, “땅은 사람의 아래에 있으나, 우주(太虛)의 가운데에 있습니다.”
황제 가로되, “무엇에 의지합니까?”
기백 가로되, “거대한 기운(大氣)이 지구를 들고 있습니다. 조기(燥氣)는 대지(大地)를 건조시키고, 서기(暑氣)는 대지를 증발시키며, 풍기(風氣)는 대지를 움직이고, 습기(濕氣)는 대지를 적셔주며, 한기(寒氣)는 대지를 단단하게 하고, 화기(火氣)는 대지를 따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풍기와 한기는 아래에 있고, 조기와 열기는 위에 있으며, 습기는 가운데에 있고, 화기는 그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육기(六氣, 風․寒․署․濕․燥․火)가 (대지에) 들어오는 까닭으로 우주(虛)로 하여금 만물을 생화(化生)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조기(燥氣)가 지나치면 대지가 건조해지고, 서기(暑氣)가 지나치면 대지가 뜨거워지며, 풍기(風氣)가 지나치면 대지가 요동하고, 습기(濕氣)가 지나치면 대지가 질퍽거리며, 한기(寒氣)가 지나치면 대지가 (얼어서) 갈라지고, 화기(火氣)가 지나치면 대지가 굳어집니다.”
岐伯曰 天地動靜과 五運遷復을 雖鬼臾區其上候而已나 猶不能遍明하니이다. 夫變化之用은 天垂象하고 地成形하며 七曜는 緯虛하고 五行은 麗地하니 地者는 所以載生成之形類也요 虛者는 所以列應天之精氣也니이다. 形精之動은 猶根本之與枝葉也니 仰觀其象하면 雖遠이나 可知也니이다.
帝曰 地之爲下否乎아?
岐伯曰 地爲人之下하나 太虛之中者也니이다.
帝曰 馮乎아?
岐伯曰 大氣擧之也니이다. 燥以乾之하고 署以蒸之하고 風以動之하고 濕以潤之하고 寒以堅之하고 火以溫之하니 故로 風寒은 在下하고 燥熱은 在上하며 濕氣는 在中하고 火는 遊行其間하여 寒暑六入하니 故로 令虛而生化也하니이다. 故로 燥勝則地乾하고 署勝則地熱하며 風勝則地動하고 濕勝則地泥하며 寒勝則地裂하고 火勝則地固矣하니이다.
이 외에도 「소문」 69편 ‘기교변대론(氣交變大論)’에는 천문관측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과 함께 그에 따른 기상이변과 인간의 건강과의 관계를 다루는 내용이 있는 등 여러 곳에서 천문과 지리에 따른 천기 지기의 작용과 인간 건강과의 상관성을 논하고 있다. 물론 『황제내경』에 있는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날의 기상 및 기후작용이나 건강문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황제내경』이 저술된 시기와 현대 사이에는 오랜 세월과 문명의 간극(間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황제내경』에 담긴 내용을 통하여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천문(天文)에 대한 내용이다. 『황제내경』이 대략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 후기부터 한대(漢代, BC 206∼ AD 220)에 이르러 저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동양에서는 2,000년 전에 지구가 우주 가운데 떠 있으며 해와 달을 비롯하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이 우주에서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구 천문학에 관한 오랜 역사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단적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천동설(天動說)’과 ‘지동설(地動說)’의 역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 프롤레마이오스가 A.D.140년경에 편찬한 『천문학집대성』을 통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이어져 오던 천동설을 체계화한 이후 중세 가톨릭의 교의(敎義)에 힘입어 ‘천동설’은 1400여 년 동안 서양의 우주관을 지배하였다. 한편 ‘지동설’은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 사람 아리스타르코스가 최초로 제안하였으나 히파르코스 등에 의해 부정되었고,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출간된 저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우주체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태양중심의 지동설을 주장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근대 이후의 우주관을 대변하게 되었다.
현대 과학문명은 인공위성과 각종 전파망원경을 이용하여 관측함으로써 우주의 실체에 보다 더 접근하고 있다. 현대 과학의 결과를 ‘천동설’과 ‘지동설’에 비유하자면 ‘우주운동설(宇宙運動說)’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천동설’과 ‘지동설’은 옳고 그름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진실이라 한다면, 관점과 가치관은 진실일수도 있지만 진실에서 벗어나거나 더 나아가 허위(虛僞)일 수도 있다. 천동설을 교의(敎義)로 하였던 가톨릭에 반하여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지동설의 철회(撤回)를 강요받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사례에서 보듯이 종교적이고 이념적인 신념과 가치관은 진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과 사회, 자연과 우주를 미시의 세계로부터 거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아마도 진정한 깨달음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른바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이전에 이미 모든 존재자와 현상은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현행본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25장 말미에 표현된 ‘도법자연(道法自然) -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일 것이다.
'종교철학과 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역』에 내재한 종교성과 현대적 의미 (0) | 2018.01.20 |
---|---|
마음과 정신에 자유를! (0) | 2015.04.09 |
인간은 현재(現在)가 아닌 미래(未來)를 살고 있다. (0) | 2015.03.02 |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와 지성여신(至誠如神) (0) | 2015.02.23 |
독경(讀經)은 마음의 파동을 일으켜 정신과 육체를 일깨운다. (0) | 2015.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