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인류사에 있어 『주역』은 가장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주역』을 인류의 정신적인 산물이라고 본다면, 거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그 투영된 인간의 마음은 보다 보편적이고 근원적이고 초월적이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실제적으로 지금 존재하려는 거룩한 그 무엇을 지향한다.
그런데 『주역』이 한대(漢代)에 오경의 하나로 자리 잡은 이후 유교의 주요 경전으로 확립되면서 주역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유가의 철학적 사유에서 논의되어 왔으며, 특히 성리학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교의 성장배경에는 항상 도교와 불교의 세력 확장에 따른 유교 나름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리학이 구축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시 말하면 도교와 불교와의 차별화를 모색해 가는 과정에서 종교적 측면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지녀 왔다고 할 수 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원형으로서의 종교성을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역』은 시대적 이념성을 초월한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주역』에 담겨 있는 사유 내지 원리가 특정 종교적 사유 내지 학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원형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으며, 따라서 『주역』에는 인간의 고유의 종교성이 깊이 배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원상 고대 인류와 함께 한 『주역』에는 정신사적으로 종교성이 깊이 배여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경전의 내용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주역』에서의 신(神)과 신앙(信仰)의 문제를 종래의 성리학적 해석과는 달리 종교학적 내지 신학적 해석으로 살펴보았다.
『주역』은 연원상 원시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형성되었다. 그리고 공자를 위시한 많은 사람들의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내용이 풍부해졌다. 그런데 현대적 사유로 『주역』을 논한다고 하여 고대적 관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실상 인류사에 있어서의 종적 진화사를 지금 이 순간의 횡적 지평선 위에서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첨단화된 현대 문명 속에서도 미신이라 치부했던 고대적 종교 관념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는 문명이 현대화 과학화되었다고 하여 인간의 정신세계에 내재된 기본적 원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종교문화는 세속화와 종교다원성이라는 새로운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속화는 종교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종교가 사회의 모든 질서와 제도를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개인의 종교적 믿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세속화의 다른 측면은 종교다원성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세속화는 특정 종교의 권력과 권위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와의 교섭이나 수용을 통하여 개인의 영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권위적인 이슬람문명을 유지하고 있던 중동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는 일찍이 종교다원성이 전개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조직화된 권력으로서의 종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신성과 영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변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대인의 관념이 미신적이었고 현대인의 관념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과학문명의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고대인이 품었던 자연과 신에 대한 경외감과 초월의식이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축적된 인류의 지혜의 산물인 『주역』에는 인간 또는 인류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종교적 심성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제사’라는 형식과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사 드리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며, ‘점’이라는 용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파국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실존 속에서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주역』에서의 ‘신’이란 용어를 두고 자연을 의미한다거나 이치를 말한다고 하거나 여러 가지 논변을 하지만, 궁극적인 원인자와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신비한 대자연의 변화를 아우른다면 그리고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의 전체를 관조한다면, 그러한 개념을 둘러싼 논의들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인간의 삶은 삶 자체인 것이지 ‘개념’ 속에 인간의 삶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을 온전히 이해할 때, 인간에 내재된 종교적 심성은 그 자체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주역』에서의 신(神)은 특정되어 있지 않으며 역(易)이라는 것 또한 특정한 체(體)가 없듯이(『周易』 「繫辭上傳」 제4장 : 神无方而易无體), 『주역』에 함유된 근원적인 종교성은 현대사회에서도 온전히 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적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 실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신성수, 「『주역』에 내재한 종교성과 현대적 의의」, 『철학·사상·문화』 23호, 동국대학교 동서사상연구소, 2017, 128∼151쪽’에서 결론부분(146∼148쪽)을 전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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