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관습은 종교성 · 민족성 · 이념성 등에 기초하여 일정한 공동체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회공동체나 조직에서 일정한 관행(慣行)이 주기적(週期的)으로 반복됨으로써 형성된다. 주기성에 바탕을 둔 관습의 대부분은 지구의 공전(公轉)에 따른 1년 단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관습이 새해의 시작이 될 것이다.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사실 지구의 공전주기(公轉週期)에 따른 새해의 시작은 24절기로 보면 동지(冬至)가 될 것이다. 전통적 사유로 볼 때, 동지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길어 음(陰) 기운이 극성한 때이면서 동시에 다시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게 되어 양(陽) 기운이 생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기운이 다시 생한다고 하여 ‘일양시생(一陽始生)’이라 표현하고, 천기(天氣)가 생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하늘이 자시(子時)에 열린다고 하여 ‘천개어자(天開於子)’라는 표현을 하였다. 천기에 이어 다음으로 지기(地氣)에 양기운이 드리워지니 ‘지벽어축(地闢於丑)’이라 하고, 그 다음으로 인기(人氣)에 양기운이 전해지니 ‘인생어인(人生於寅)’이라 하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의서(醫書) 가운데 하나인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은 천기와 지기와 인기의 상호작용을 파악하여 인간의 건강과 질병 및 처방을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천기와 지기의 작용을 토대로 기후(氣候)와 기상(氣象)의 변화를 다루고 있는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에서는 새해의 시작을 대한(大寒)일로 보고 있다. 한편 인간의 운명을 주로 보는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에서는 입춘(立春)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요컨대 천기(天氣)를 위주로 하느냐 지기(地氣)를 위주로 하느냐 인기(人氣)를 위주로 하느냐에 따라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도 달라지는 셈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관점과는 달리,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적 주기성의 근거는 이른바 양력(陽曆)과 음력(陰曆)이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은 순태음력(純太陰曆)이 아닌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이다. 서양책력과 동양책력의 역사는 인류사만큼이나 복잡한 과정을 통하여 현재의 책력으로 정해졌다. 양력으로 새해는 벌써 시작되어 2월 중순을 지나게 되었고, 이제 우리의 음력으로 정월 새해가 시작되었다. 을미(乙未)년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주기 1년의 시작을 기리며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예로부터 새로운 1년의 시작은 매우 중요하기에 천지신명(天地神明)과 조상(祖上)에게 큰 제사를 올리며 지상의 평화와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여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새로운 1년의 시작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기원(祈願)이자 축제(祝祭)였다. 국가 민족 부족 지방 종교 집안 등 저마다의 관습에 의한 예(禮)와 절차(節次)에 따라 새해의 시작을 기원하는 행사가 펼쳐진다.
관습에는 일정한 절차와 예가 있다. 절차와 예는 특히 다중(多衆)이 모인 행사에서 중요하다. 다중이 모인 의식(儀式)에서는 통일된 절차를 통하여 다중의 조화(調和)를 이끌고 행사의 의미를 극대화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체를 의미하는 ‘사(社)’는 원래 토지의 신에게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경배하는 것이고, 국가와 민족의 근원을 경배하는 것이며, 각 씨족과 가문의 근원이 되는 조상을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에서 형식과 절차는 참례자들을 조화롭게 이끌면서 행사의 의미를 극대화하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정성(至誠)’일 것이다. 때문에 모든 종교행사나 제사의식에서의 예(禮)와 절차(節次)는 참례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마음으로 ‘지극한 정성’의 상태로 이끄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킨다(至誠感天)고 하듯이, 『중용(中庸)』에서는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고 하였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키고 신(神)과 함께 할 수 있는 요체(要諦)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형식과 절차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극한 정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이라 할 것이다. 『주역(周易)』 대과(大過)괘 초효(初爻)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자리는 까는데 흰 띠를 쓰니 허물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계사상전」 제8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초육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자리를 까는데 흰 띠를 쓰니 허물이 없다.”고 하니, 공자 이르길 “(제물을) 진실로 저 땅에 두더라도 괜찮거늘 (자리를) 까는데 띠를 쓰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삼감의 지극함이다. 무릇 띠라는 물건이 천박하지만 쓰임은 소중한 것이니, 이러한 방법을 삼가서 써 가면 그 잃는 바가 없을 것이다.(初六藉用白茅니 无咎라하니 子曰 苟錯諸地라도 而可矣어늘 藉之用茅하니 何咎之有리오 愼之至也라 夫茅之爲物이 薄而用은 可重也니 愼斯術也하야 以往이면 其无所失矣리라.)
이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진실로 정성을 드림에 있어서는 그냥 맨 땅에 진설(陳設)하더라도 괜찮은데 주변에 있는 띠를 모아서 바닥에 깐다는 것은 삼가 ‘지극한 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로 띠(茅)라는 것은 풀이 말라 아무 쓸모없는 것이지만, 그 쓸모없는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에 따라서는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을 오히려 소중하게 쓸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다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을 드림에는 사실 웅장한 시설과 화려한 꾸밈, 산해진미(山海珍味), 번다한 절차, 성스러움의 권위(權威)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스스로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마음, ‘지극한 정성(至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매일 쏟아지는 과학문명의 이기(利器)들로 세상의 들판을 계속 채워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그러한 신제품들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계속 에워싸고 있다. 세상은 인간이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채워지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들은 온갖 쓰레기가 되어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인간의 생명에 필요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마치 아무 쓸모없는 띠처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평소에 하찮게 여기고 있는 그 무엇이 인간의 삶과 생명에 가장 중요한 것일 수가 있다. "가장 하찮게 여기는 것이 사실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 것이다."
『장자(莊子)』 「내편(內篇) 인간세(人間世)」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모른다.”(知有用之用而莫知無用之用)는 말이 있다. 또한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11장에는 “있음(有)으로 이롭게 되는 것은 없음(無)으로 쓰임을 삼기 때문이다.”(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라고 하였다. ‘쓸모없음(無用)’과 ‘무(無)’는 인간이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육체적 삶과 물질문명의 바탕을 이루고 근원이 되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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