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송대의 주자(朱子, 1130∼1200)를 들 수 있다. 주자는 당시 유난히 의리역에 치중하였던 풍토를 비판하였다. 그는 『주역』이 복서(卜筮)에서 연원하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주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아래에서는 『주역전의대전』 「역설강령 2」에 수록된 주자의 글을 발췌하여 옮겨 새겨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당시 『주역』을 논하면서 의리역에만 치중하던 풍토에 대한 비판, 『주역』의 연원과 복서(卜筮)와의 관계, 『주역』 『시경』 『서경』의 차이, 『주역』에 담긴 이치의 은미함과 원대함, 『주역』을 공부하는 진정한 방법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주자의 논설에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깊이 음미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
易說綱領 2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朱子曰
○ 역(易)은 다만 복서(卜筮)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례(周禮)』에 분명히 “태복(太卜)이 세 역(易)을 관장하였으니, 연산(連山)·귀장(歸藏)·주역(周易)이다.”라고 하였으니, 옛사람은 복서(卜筮)하는 관원을 세움이 무릇 여러 명이었고, 진(秦)나라는 옛날과 멀지 않았던 까닭에, 『주역』이 또한 복서(卜筮)하는 책이라 하여 불에 타지 않게 되었다. 지금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역(易)이 복서(卜筮)하는 책이라고 말하면 곧 역(易)을 욕되게 하고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하니, 부자(夫子)께서 많은 도리를 말씀한 것을 보고 곧 역(易)은 다만 도리를 말한 것이라고 하고, 역(易)에서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을 말한 것이 모두 이치가 있어서 사람을 가르치는 뜻이 들어 있지 않음이 없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복서(卜筮)하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易은 只是爲卜筮而作이라. 故로 周禮에 分明言太卜이 掌三易連山歸藏周易이라하니 古人이 於卜筮之官에 立之ㅣ 凡數人하고 秦이 去古未遠이라 故로 周易이 亦以卜筮로 得不焚이라. 今人은 才說易是卜筮之書면 便以爲辱累了易이라하니 見夫子ㅣ 說許多道理하고 便以爲易이 只是說道理요 殊不知其言吉凶悔吝이 皆有理而其敎人之意ㅣ 无不在也라. 而今所以難理會時는 蓋緣亡了那卜筮之法이니라.
예컨대 태복(太卜)이 세 역을 관장하는 법에 연산·귀장·주역이 별도로 점치는 법이 있었으나, 『주역』의 법도 지금은 다만 상경(上經)·하경(下經) 두 편만 있고 점치는 많은 법을 볼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성인이 도리를 말씀하셨으니, 그 가운데에 복서(卜筮)하는 말이 있다.”라고 하나, 이치를 말한 다음에 어디서 점치는 법이 따라왔다고 말하는가?
如太卜掌三易之法에 連山歸藏周易이 便是別有理會나 周易之法도 而今에 却只有上下經兩篇하고 皆不見許多法了하니 所以難理會라. 今人은 却道聖人이 言理而其中因有卜筮之說이라하나 他說理後에 說從那卜筮上來做麽아.
○ 역(易)은 다만 사람이 복서(卜筮)하여 의혹을 결단하는 것이니, 만약 도리가 마땅히 해야 하면 진실로 곧 해야 하고, 만약 도리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하면 스스로 하지 말아야 하니, 어찌 다시 점칠 것이 있겠는가? 다만 한 가지 일이 혹 길하고 혹 흉해서 두 갈래 도리(道理)이면, 어떻게 처치할지 알지 못하므로, 이럴 때 점(占)을 사용하는 것이다.
易은 只是與人卜筮하여 以決疑惑이니 若道理ㅣ 當爲면 固是便爲요 若道理ㅣ 不當爲면 自是不可做니 何用更占이리오. 却是有一樣事에 或吉或凶하여 兩岐道理면 處置不得일새 所以用占이니라.
○ 『주역』을 읽는 법이 아마도 의심하건대 괘효의 말은 본래 복서하는 자를 위하여 길흉을 결단하고 훈계하는 말을 갖추더니, 「단전(彖傳)」「상전(象傳)」「문언전(文言傳)」이 지어짐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길흉과 훈계하는 뜻으로 인하여 의리(義理)를 미루어 말해서 밝히게 되었을 것이다. 뒤에 사람들은 다만 공자(孔子)가 의리(義理)를 설명한 것만 보고, 다시는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본의(本意)를 근본으로 하여 미루지 않으며, 복서(卜筮)를 비루하게 여겨 굳이 말할 것이 못된다고 하니, 그 말하는 것이 마침내 일상생활에 쓰는 실제(實際)와 거리가 멀고, 모두 끌어다 맞추고 왜곡해서 편벽되이 한 가지 일만을 주장하여 말하니, 다시는 포함하여 관통하고 곡창(曲暢)하여 두루 통하는 묘함이 없게 되었다.
讀易之法이 竊疑卦爻之辭는 本爲卜筮者하여 斷吉凶而具訓戒러니 至彖象文言之作하여 始因其吉凶訓戒之意하여 而推說其義理以明之니라. 後人은 但見孔子所說義理하고 而不復推本文王周公之本意하며 因鄙卜筮하여 以爲不足言이라하니 而其所以言者ㅣ 遂遠於日用之實類하고 皆牽合委曲하여 偏主一事而言하니 无復包含該貫曲暢旁通之妙라.
만약 다만 이렇다면 성인이 당시에 스스로 따로 한 책을 지어 의리를 분명히 말씀하여 후세에 가르쳤을 것이니, 어찌 괘상(卦象)에 가탁하여 이처럼 어렵고 심오하고 은미한 말씀을 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무릇 한 괘와 한 효를 읽고자 함에 곧 점서하여 얻은 것처럼 여겨서, 마음을 비우고 말한 뜻이 가리키는 바를 찾아서 길흉과 가부의 결단을 한 뒤에, 그 상(象)의 소이연(所以然)을 상고하고, 그 이치의 소이연(所以然)을 찾아서 일에 미루어 쓰면, 위로는 왕공(王公)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모두 쓸 수 있을 것이니, 사사로이 생각하건대 이렇게 (역의 도를) 구해야 세 성인의 남기신 뜻을 얻을 듯하다.
若但如此면 則聖人이 當時에 自可別作一書하고 明言義理하여 以詔後世시리니 何用假託卦象하사 爲此艱深隱晦之辭乎아. 故로 今欲凡讀一卦一爻에 便如占筮所得하여 虛心以求其辭義之所指하여 以爲吉凶可否之決然後에 考其象之所以然者하고 求其理之所以然者하여 推之於事면 使上自王公으로 下至民庶히 所以修身治國에 皆有可用이니 私竊컨대 以爲如此求之라야 似得三聖之遺意니라.
○ 공자의 역은 문왕의 역이 아니고, 문왕의 역은 복희의 역이 아니며, 이천의 『역전』은 자체로 정씨(程氏)의 역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이 또한 옛 역(易)의 차례를 따라 먼저 본문(本文)을 읽으면 본지(本旨)를 알게 될 것이다.
孔子之易은 非文王之易이요 文王之易은 非伏羲之易이며 伊川易傳은 自是程氏之易也라. 故로 學者ㅣ 且依古易次第하여 先讀本文則見本旨矣리라.
○ 역(易)을 볼 때에 모름지기 저 괘를 긋기 이전에 어떻게 모양이 나왔을까를 생각하고, 그 속에서 나아가 허다한 괘효와 상수가 두찬(杜撰, 허구로 조작함)한 것이 아니고, 모두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괘를 긋기 이전에는 곧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아서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지 않은 중(中)으로, 다만 한 개의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할 뿐이나, 홀연히 그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에서 한 개의 상(象)이 있어서 비로소 허다한 상수와 길흉과 도리를 도출한다. 이 때문에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깨끗하고 고요하고 정미롭고 은미한 것이 역(易)의 가르침이다.”라고 한 것이니, 대개 『주역』의 글이 허공에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看易에 須是看他未畫卦已前에 是怎生模樣하고 却就這裏하여 看他許多卦爻象數ㅣ 非是杜撰이요 都是合如此라. 未畫已前엔 便是寂然不動하여 喜怒哀樂未發之中으로 只是箇至虛至靜而已나 忽然在這至虛至靜之中에 有箇象이 方說出許多象數吉凶道理라. 所以禮에 曰潔靜精微ㅣ 易敎也라하니 蓋易之爲書ㅣ 是懸空做出來라.
『서경(書經)』같은 것은 곧 참으로 그런 정사(政事)와 모모(謀謨, 정략, 정책)가 있어서 바야흐로 글을 써놓은 것이고, 『시경(詩經)』은 참으로 그런 인정(人情)과 풍속(風俗)이 있어서 바야흐로 그런 시를 지어놓은 것이나, 『주역(周易)』은 도무지 이왕에 그런 일이 없고 다만 가공(架空)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효(爻)의 획이 있기 이전에는 역(易)은 혼연(渾然)한 한 이치이고, 사람에 있어서는 담연(湛然)한 한 마음이며, 이미 효(爻)의 획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이 효(爻)가 어떠한 것이고 이 효는 또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두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에 나아가 허다한 상수(象數)가 나왔으니, 이 때문에 신령스러운 것이다.
如書는 便眞箇有這政事謀謨하여 方做出書來하고 詩는 便眞箇有這人情風俗하여 方做出詩來로되 易은 却都无這已往底事요 只是懸空做底라. 未有爻畫之先엔 在易則渾然一理요 在人則湛然一心이며 旣有爻畫이라야 方見得這爻是如何요 這爻又是如何라. 然而皆是就這至虛至靜中하여 做出許多象數來니 此其所以靈이니라.
○ 역(易)은 가장 보기 어려우니, 책의 내용이 광대하여 모두 갖추어져서, 만 가지 이치를 포함하여 있지 않은 것이 없으나, 그 실제는 옛날에 복서(卜筮)하던 책이니, 반드시 이치만 말한 것이 아니고, 상수(象數)도 또한 말할 수 있었으니, 처음부터 한 쪽에 치우쳐 있지 않았다.
易은 最難看하니 其爲書也ㅣ 廣大悉備하여 包涵萬理하고 无所不有하나 其實은 是古者卜筮書로 不必只說理요 象數도 亦可說이니 初不曾滯於一偏이니라.
내가 근래에 역(易)을 보니, 성인이 본래 많은 수고를 해서 만든 것이 아님을 알았다. 후세에 한결같이 망령된 뜻으로 보태고 빼서 곧 한 가지 설을 지어내어 그 뜻을 억지로 통하게 하고자 하니, 이 때문에 성인의 경지(經旨)가 더욱 밝지 못하게 되었다.
某ㅣ 近看易에 見得聖人이 本无許多勞攘이라. 自是後世ㅣ 一向妄意增減하여 便要作一說하고 以强通其義하니 所以聖人經旨ㅣ 愈見不明이라.
또한 역(易)을 해석함에 다만 한 개의 ‘허(虛)’자를 더해서 봐야 뜻을 비로소 알 수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역(易)을 해석할 때에 ‘실(實)’자를 더하여 그것을 빌어서 자기의 뜻으로 삼아 말하고, 또 혹자의 일설(一說)이 자기 설을 깨뜨릴까 두려워하니, 그 형세가 지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일설(一說)을 만들어 비호하려고 아끼니, 천 가지를 말하고 만 가지를 말하더라도 역(易)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책은 본래 보기 어려운 물건이니, 작고 교묘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또한 크게 해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且如解易에 只是添虛字去迎過라야 意來便得이어늘 今人은 解易에 乃去添他實字하여 却是借他做己意說了하고 又恐或者一說이 有以破之하니 其勢ㅣ 不得不支離라. 更爲一說하여 以護吝之하니 說千說萬이라도 與易으로 全不相干이라. 此書는 本是難看底物이니 不可將小巧去說이요 又不可將大話去說이니라.
○ 역(易)은 보기 어려우니, 말로 형용해서 알 수가 없다. 대개 효사(爻辭)는 하나의 그림자(影)를 말한 것이지만, 상(象)이 그 속에 있어서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다.
易은 難看이니 無箇言語可形容得이라. 蓋爻辭는 是說箇影이로되 象이 在那裏하여 无所不包니라.
○ 역(易)은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하게 하고자 함이니, 지금 역을 배울 때 반드시 일을 만나 점치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경계하는 바를 두는 것이 아니고, 다만 평상시에 완미하여 저 역(易)에서 말한 도리가 자신이 처한 지위에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거(居)할 때에는 그 상을 보고 그 말을 완미하며, 동(動)할 때에는 그 변(變)을 보고 그 점(占)을 완미한다.”고 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이르신바 역(易)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평소에 항상 배우는 것이니, 생각하건대 성인의 읽는 것이 일반인의 이른바 읽는다는 것과 다르다고 본다. 가슴 속에 역(易)의 이치가 훤히 트여서 털끝만큼도 가린 곳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큰 허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易은 大槪欲人이 恐懼修省이니 今學易에 非必待遇事而占하여 方有所戒요 只平居에 玩味하여 看他所說道理於自家所處地位에 合是如何라. 故로 云居則觀其象而玩其辭하고 動則觀其變而玩其占이라. 孔子所謂學易은 正是平日에 常常學之니 想見聖人之所讀이 異乎人之所謂讀이라. 想見胸中에 洞然於易之理하여 无纖毫蔽處라 故로 云可以无大過라하시니라.
○ “역(易)을 읽는 법은 먼저 정경(正經: 경문)을 읽고, 깨닫지 못하면 「단전」「상전」「계사전」을 가지고 풀어야 할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역(易)의 효사(爻辭)는 첨사(籤辭: 비결의 말)와 같다.”
讀易之法은 先讀正經하고 不曉면 則將彖象繫辭來解니라. 又曰 易爻辭는 如籤辭라.
○ 묻기를 “역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답하기를 “다만 마음을 비워 그 뜻을 구해야 할 것이고,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읽지 말아야 하니, 다른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러하다.”
問易을 如何讀이닛가. 曰 只要虛其心하여 以求其義요 不要執己見讀이니 他書亦然이니라.
○ 묻기를 “역(易)을 읽음에 푹 배어들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답하기를 “모름지기 이 마음이 허명(虛明)하여 편안하고 고요해야 자연 도리(道理)가 흘러 통하여, 곧 허다한 의리(義理)를 포괄하게 된다. 대개 역(易)은 『시경』『서경』에 비교할 수 없으니, 역은 천하 후세의 무궁무진한 사리(事理)를 다 말한 것이다. 다만 ‘양(兩)’자 하나가 곧 하나의 도리이다. 또 사람들이 모름지기 천하의 허다한 일의 변화를 경험해 편력한 후 역(易)을 읽어야, 비로소 (주역의 글이) 각각 하나의 이치가 있어 정밀하고 자세하고 단정함을 알 수 있는데, 이제 이미 경험과 편력을 다하지 못했으니, 이 마음이 대단히 허명(虛明)하여 편안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또 말씀하기를 “지금에 일찍이 허다한 일을 겪어 보지 않았으면, 도무지 그 도리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니, 만약 곧 가서 (주역을) 보더라도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도 만년에 역을 좋아하였으니, 이 책은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問讀易에 未能浹洽은 何也오. 曰 此須是此心이 虛明寧靜이라야 自然道理ㅣ 流通하여 方包羅得許多義理니라. 蓋易은 不比詩書니 他是說盡天下後世ㅣ 无窮无盡底事理라. 只一兩字ㅣ 便是一箇道理니라. 又人이 須是經歷天下許多事變하고 讀易이라야 方知各有一理ㅣ 精審端正이어늘 今旣未盡經歷하니 非是此心이 大段虛明寧靜이면 如何見得이리오. 此不可不自勉也니라. 又曰 如今에 不曾經歷得許多事過면 都自揍他道理不着이니 若便去看이라도 也卒未得他受用이라. 孔子도 晩而好易하시니 可見這書ㅣ 卒未可理會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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