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산책/주역의 기본원리

『주역』의 학문적 성격: 『주역』은 기초학문이자 종합학문이다

돈호인 2022. 3. 31. 17:59

 

  기독교 성경(聖經, the Bible)에서 구약(舊約)의 시대가 그러하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늘에 대한 제사와 더불어 행해진 신탁(神託)과 점술(占術)이다.

 

  동아시아의 오래된 고전 가운데 하나인 주역은 상고시대에 하늘에 대한 제사와 함께 행해진 점술(占術)의 편린들, 다시 말하면 거북점()과 시초점()에 연원을 둔 복서역(卜筮易)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주역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주역에 대한 학설은 철학사적 관점에서 대체로 상수역(象數易)과 의리역(義理易)이라는 큰 흐름으로 전개되어 왔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각 시대별로 학자마다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

 

  『주역의 학문적 성격을 논하려면 고대로부터 전개되어 온 주역철학사의 흐름을 통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주역은 고대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사에 바탕을 둔 점서(占書)로서의 특성이 있는데, 이것은 미신으로서의 점술이라기 보다는 천신(天神)에 대한 신성한 신탁(神託)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주역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등장한 상수학(象數學)적인 측면과 정치 종교 철학을 망라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의리학(義理學)적인 측면이 있다. 더 나아가 주역은 현대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전개된 과학역(科學易)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종합학문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주역은 점서(占書)이기도 하고, 철학서이기도 하며, 종교서이기도 하고, 정치학이기도 하며, 과학서이기도 하다. 오늘날 주역의 성격을 놓고 특정 종교의 이념이나 특정 학파의 이론에 치우쳐서 주장하거나, 또는 어느 개인 스스로의 신념에 바탕하여 주장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지엽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는 주된 원인으로는 무엇보다도 근대 이후 주역에 대한 학문적 인식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조선시대에 국가체제와 이념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누렸던 주역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서구식 학문의 유입과정을 거치면서 무속--미신-주역이라는 연결선상에 배치되어 제도권에서 금기시되는 학문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주된 원인으로는 첫째로는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 말살정책, 둘째로는 조선시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대한 불교계의 반작용, 셋째로는 기독교적 세계관, 넷째로는 개벽사상에 기초한 신흥종교의 영향, 그리고 다섯째로는 용어상 역술(易術)과 역학(易學) 주역의 개념을 혼용(混用)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적인 학문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주역은 기초학문이자 종합학문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역은 태극(太極)양의(兩儀; , )사상(四象; 태양, 소음, 소양, 태음)팔괘(八卦; , , , , , , , )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여 주역경문의 골격을 이루는 64384효에 이르기까지, 음양기운(陰陽氣運)의 분화와 통합 그리고 괘()()의 상호관계와 효()의 변화로 인한 본괘(本卦)와 지괘(之卦)의 유기적 관계 등을 통하여 자연과 사회 및 인간의 변화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주역에 내재된 음양이진법의 상징적(象徵的) 부호체계(符號體系)는 자연율(自然律)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음양(陰陽)의 상징체계는 이진법(二進法) 수리를 기초로 하여 대수학(代數學)기하학(幾何學) 등의 수학(數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는 더 나아가 수학(數學)에 기초하고 있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의 여타 학문과도 연계되어 연구되고 있다.

 

  둘째, 주역의 경문(經文)에 해당하는 괘사(卦辭)와 효사(爻辭) 그리고 경문에 대한 해설서인 이른바 십익전(十翼傳)은 그 자체로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이는 오늘날 인문과학(人文科學)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주역이란 경전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문학(文學)의 대상이 되며, 유교철학과 유교사상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문자학(文字學), 기호학(記號學), 수사학(修辭學), 논리학(論理學), 철학(哲學), 종교학(宗敎學)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주역과 관련하여 연구되고 있다.

 

  셋째, 주역64384효에 내포되어 있는 상황적 원리는 오늘날 사회과학(社會科學)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주역의 괘()와 효()는 전체(全體)와 부분(部分)의 관계를 나타내며, 64384효의 유기적 관계를 통하여 사회적 상황의 변화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주역64괘가 각각 표현하고 있는 상징성은 인간사회의 모든 양상에 투영될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주역은 오늘날 정치학(政治學), 사회학(社會學), 경제학(經濟學), 법학(法學), 행정학(行政學), 경영학(經營學) 등의 현대 학문과 연계되어 연구되고 있다.

 

  넷째, 주역의 음양론(陰陽論)은 또한 전통적으로 자연과 인체의 기()의 작용으로 파악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해 왔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에도 인간의 본질론과 정신과 육체의 관계 및 건강학과 관련한 학문의 이론적 토대로 논의되고 있다. 그래서 현대 의학의 여러 분과, 예컨대 유전공학(遺傳工學), 생명공학(生命工學), 한의학(韓醫學), 자연치유학(自然治癒學) 등의 학문영역과 각종 무예(武藝)의 이론구성에서도 주역원리에 관한 연구가 주요 과제로 되고 있다.

 

  다섯째, 주역의 상징체계는 전통문화와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철학적 사상적 원리로 설명되어 왔다. 따라서 특히 우리나라와 동양의 전통문화와 관련되어 있는 오늘날의 문화예술분야에도 주역의 원리와 철학사상이 응용되고 있으며, 특히 궁중음악(宮中音樂), 전통예술(傳統藝術), 미학(美學) 등의 현대 예술학 분야에서도 주역과 관련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섯째, 주역에 내재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미래예측학(未來豫測學)이라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고대의 점서(占筮)에서 출발한 주역의 이론은 한대(漢代)에 들어와 상수역학으로 정립되었는데, 위진(魏晋)시대 이후 확립된 의리역학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아 오긴 하였으나, 점서(占筮)와 상수역(象數易)의 근저에는 자연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사회의 변화를 알아보고자 하는 '미래예측'이라는 핵심적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주역에 내재된 자연률(自然律)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지구환경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양상 그리고 인간의 변화를 예측하여 대처해 나가고자 하는 지혜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야는 오늘날 '미래예측학'이라는 영역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복서(卜筮)를 포함한 전통적인 상수역학을 현대사회에 투영하여 과학적으로 재조명하고, 상황판단과 미래예측, 복서(卜筮)와 정치행위, 인간의 의사결정론 등과 관련하여 주역의 원리를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신성수, 2010, 주역학의 연구동향과 향후과제, 동방논집31, 동방대학원대학교, 4251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