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 민주사회에서의 의사결정의 합리성에 대하여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 원리는 인간은 이성적(理性的)이고 합리적(合理的)인 존재로서 자유의지(自由意志)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진다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언행이 진정 자유의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하여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근대 이후의 역사적 사실과 오랜 사회적 경험을 통해 볼 때, 인간의 의사결정은 결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이 어떠한 의사결정을 할 때, 자유의지에 의한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이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내용에는 그 자신만의 영역을 벗어난 대단히 복잡한 주변적 상황의 인과관계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의사결정에서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소신에 의하여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기보다는 실질이 없을 수도 있는 다수의 의견을 만들고 그 의견에 동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의 구조와 관련하여 볼 때, 인간의 의사결정이 의식에 기초를 둔 순수한 이성적 판단(자유의지)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세계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만드는 가장 큰 힘은 지역 연고(緣故)나 학벌(學閥)에 호소하는 것인데, 이러한 지역 연고주의나 학벌주의는 개개인의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존하기보다는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
셋째,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대부분의 주제에는 각 개인과 집단이 지향하는 이해관계에 따른 힘의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합리적인 이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의 차원에서 벌어질 경우에는 집단과 집단의 갈등으로 이어져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은 개인적 이기주의의 충돌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결론적으로 사회생활에서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의사결정과정을 살펴보면, 예컨대 하루 24시간에 이루어진 개개인의 언행을 돌이켜 보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이나 기업의 의사결정 및 각 조직과 모임의 의사결정과정 등을 살펴보면, 과연 인간이 내리고 있는 의사결정에 이른바 합리적 이성에 입각한 정의(正義)가 얼마나 살아 숨쉬고 있는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에서의 의사결정방법과 점(占)
1) 『서경』 「홈범」편의 의의
『대학』『중용』『논어』『맹자』『시경』『서경』『역경』의 사서삼경(四書三經) 가운데 가장 정치적 원리를 다루고 있는 경전이 『서경』이다. 이 『서경(書經)』「주서(周書)」가운데 「홍범(洪範)」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홍범구주(洪範九疇)’라고 일컫고 있다.
「홍범(洪範)」은 『주역』이 형성된 시대적 배경이기도 한 은나라 말기 주나라 초기의 시대상과 연결되어 있다. 은(殷)나라 말기 마지막 왕인 폭군 주왕(紂王)이 당시 은나라 제후국으로서 서쪽에 있었던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인 무왕(武王)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은나라는 멸망하고 주나라가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당시 일개 제후국으로 있다가 천하를 다스리게 된 주나라 무왕으로서는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통치술이 필요했는데,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 기자(箕子)를 찾아가 정치의 대법(大法)을 묻게 된다. 이에 기자(箕子)는 무왕에게 정치의 대법을 9가지 범주로 전해 주었는데 이것이 ‘홍범구주’이다.
정치의 대법인 9가지 범주를 보면, 첫 번째는 오행(五行)이고, 두 번째는 공경함을 오사(五事)로써 함이요, 세 번째는 농사에 팔정(八政)을 씀이요, 네 번째는 합함을 오기(五紀)로써 함이요, 다섯 번째는 세움을 황극(皇極)으로써 함이요, 여섯 번째는 다스림을 삼덕(三德)으로써 함이요, 일곱 번째는 밝힘을 계의(稽疑)로써 함이요, 여덟 번째는 상고함을 서징(庶徵)으로써 함이요, 아홉 번째는 향함을 오복(五福)으로써 하고 위엄(威嚴)을 육극(六極)으로써 함이다.
(初一은 曰五行이오 次二는 曰敬用五事오 次三은 曰農用八政이오 次四는 曰恊用五紀오 次五는 曰建用皇極이오 次六은 曰乂用三德이오 次七은 曰明用稽疑오 次八은 曰念用庶徵이오 次九는 曰嚮用五福이오 威用六極이니라.)
2) 의사결정방법으로서의 복서(卜筮)의 의의
홍범구주 가운데 일곱 번째인 계의(稽疑)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일곱 번째 계의(稽疑)는 복서(卜筮)하는 사람을 가려 세우고 이에 복서를 명하니라.… 이 사람을 세워 복서를 하되 세 사람이 점을 치면 곧 두 사람의 말을 따를지니라. 네가 곧 큰 의문이 있거든 꾀함을 네 마음에 미치며, 꾀함을 경사(卿士)에 미치며, 꾀함을 서민(庶民)에 미치며, 꾀함을 복서(卜筮)에 미쳐라. 네가 곧 따르며, 거북이 따르며, 서(筮)가 따르며, 경사가 따르며, 서민도 따르면, 이를 일러 대동(大同)이니, 몸이 건강하며 자손이 길함을 만나리라.…”
(七稽疑는 擇建立卜筮人하고사 乃命卜筮니라. … 立時人하야 作卜筮호대 三人이 占이어든 則從二人之言이니라. 汝則有大疑어든 謀及乃心하며 謀及卿士하며 謀及庶人하며 謀及卜筮하라. 汝則從하며 龜從하며 筮從하며 卿士從하며 庶民從이면 是之謂大同이니 身其康彊하며 子孫이 其逢吉하리라. …)
이 내용에 나타난 정책결정방법과 복서(卜筮: 占)의 의의에 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서(卜筮)는 정책결정(의사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으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둘째,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 왕 자신이 심사숙고하고, 경사(卿士) 즉 대신들에게 묻고, 일반 백성들에게 물어 의견을 구하고, 복서(卜筮)를 통한 결과를 참고하였다. 즉 인간사회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하여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선행되었고, 이어 복서(卜筮)의 결과를 참고하였다.
셋째, 복서(卜筮)를 함에 있어서 여러 복관(卜官) 가운데 반드시 세 사람을 세워 복서(卜筮)를 명하고 그 가운데 같거나 유사한 결과를 보여준 두 사람의 말을 따르게 하였는데, 이는 신탁(神託)행위에 있어서 이른바 현대 민주주의 의사결정 원리인 다수결주의(多數決主義)가 적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고대사회의 의사결정 내지는 정책결정에 합리적인 방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시대적 구분을 떠나 어느 시대에서나 어느 장소에서나 인간사회에서 내려지고 있는 의사결정원리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가 민주적(民主的)인 사회이기 때문에 항상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모든 정책과 의사가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고대나 중세사회가 전제적(專制的)이거나 봉건적(封建的)인 사회였기 때문에 항상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정책결정을 했다고 단언하는 것 또한 모순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진실과 사실에 부합하여 상황을 판단하고 미래를 위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느냐 하는 상황판단과 미래예측의 실질적인 내용에 있는 것이다.
3. 판단예측(判斷豫測)과 점(占)
1) 판단(判斷)과 예측(豫測)
판단(判斷)이란 어떠한 주제 및 내용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결정하는 것이고, 예측(豫測)이란 현재의 상황에서 펼쳐져 나갈 앞날의 추이(推移)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간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때, 또 정책이나 의사를 결정할 때, 상황을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국가나 사회 그리고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올바른 길로 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사실 인간은 항상 판단과 예측을 하고 있다. ‘옳다 · 그르다’라는 단순판단에서부터 전체적 상황의 추이(推移)를 예측하는 종합판단에 이르기까지 인간 개개인이나 국가와 같은 조직이 하는 모든 행위가 판단과 예측인 것이다.
사람이 정상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판단과 예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 24시간을 돌이켜 보자. 얼마나 많은 문제와 상황을 판단하고 예측하고 있는가? 잠을 자는 도중 꿈을 꾸면서도 무의식의 작용으로 판단이 이루어지며, 아침에 잠에 깨면서부터 판단과 예측의 사유작용이 시작된다.
그런데 나날이 행해지는 인간의 사유와 판단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동일한 행위가 지속되면서 형성된 습관적 행위로 인하여 사실상 구체적인 행위와 상황에 대한 판단이 생략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직장에 처음 출근할 때에는 교통수단의 선택문제로 고민을 하고 판단을 하고 예측을 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일상화된 습관으로 인하여 별다른 고민이 없이 결정이 이루어진다. 즉 일상생활의 대부분이 반복행위의 습관으로 이루어지고 이미 주어진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어느 시공간(時空間)에서 할 수 있는 행위와 사유의 가능성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런 무궁무진한 가능성 가운데 사람은 판단과 예측을 통하여 어느 시공간에서의 특정 행위와 사유를 선택하여 진행하고 있다. 예컨대 내가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것을 생각하면,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그 순간과 공간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건과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범주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인간은 지금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행위하고 사유하고 있다.
2) 점(占)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어떠한 행위를 하면서 내리는 그 순간순간의 판단과 예측이 바로 점(占)이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행위하고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 상황에 처하여 예측과 판단을 스스로 하지 않고 남에게 의탁하는 경우가 있다. 현대 학문은 이러한 의탁판단을 소위 상담(相談)이라는 형식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상담에 있어서는 개개인의 심리와 객관적인 현황을 자료화하고, 그 자료를 통하여 상담자가 의뢰인에게 판단예측을 대행해 주거나 의뢰인이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담을 통해 제공되는 객관적 자료라는 것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고 관련되어 있는 총체적인 요인에 비해 극히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총체적인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무의식(無意識)에 의탁하는 행위이다. 이 무의식(無意識)에 의탁하여 상황을 투영하는 예측판단을 점(占)이라고 한다.
점(占)에는 일정한 도구를 사용하는 점(占)과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점(占)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도구를 사용하는 점(占)이란 예컨대 시초(蓍草)나 서죽(筮竹) 혹은 동전이나 카드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원리를 분석하여 예측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주명리를 통한 예측판단도 연월일시(年月日時)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도구로 사용하는 점(占)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현대인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통계분석에 의한 정책결정 역시 ‘통계자료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점(占)’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점(占)에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명상이나 참선 또는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 등을 통하여 이른바 직관(直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신(神)에게 의탁하는 행위로 이른바 하느님이나 부처님 또는 천지신명에 대한 기도(祈禱)가 여기에 해당한다.
※ 신성수, 『주역통해』(대학서림, 2005), 85∼87쪽; 신성수, 『현대주역학개론』(대학서림, 2007), 190∼20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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