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산책/주역의 기본원리

1. 역(易)과 자연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돈호인 2021. 6. 6. 13:49

노자  『 도덕경 』 제 25 장

 

人法地하고 地法天하며 天法道하고 道法自然하니라

사람은 땅의 원리를 준칙으로 삼고

땅은 하늘의 원리를 준칙으로 삼으며

하늘은 도의 원리를 준칙으로 삼고

도는 스스로 그러한 원리를 준칙으로 삼는다.

(노자 도덕경25장에서)

 

1.  『주역』에 대한 인식

 

  인간이 대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사유방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제한되어 왔다. 예컨대, 현인들의 학문연구에 있어서도,  『주역』을 논하면서  『노자』를 인용하면 그 이유만으로 유교의 종지(宗旨)에서 벗어난 사이비(似而非)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항상 어느 시대나 그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가치관이 보편성을 인정받아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 보편가치에 부응하지 못하면 이단(異端)이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역』이 대자연의 원리를 드리우고 있는 천역(天易)이기에, 대자연의 원리를 설파한 많은 철인(哲人)들의 논증과도 상통하는 면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자·장자 등 제자백가(諸子百家) 시대의 철인·현인들은 이 대자연의 원리를 그들 나름대로의 안목과 용어를 도구로 하여 표현하였고, 이들의 표현은 후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용되고 보편화되어 왔다. 도가(道家)를 표방하는 학자와 유가(儒家)를 표방하는 학자 그리고 불가(佛家)를 표방하는 학자 등 저마다의 학문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학자들은  『주역』의 성격을 놓고 많은 이론적 공방을 벌여 왔다. 그러나 유가(儒家)의 학문, 도가(道家)의 학문, 불가(佛家)의 학문이라는 인식(認識)경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대자연의 원리를 동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현인(賢人)들의 고심(苦心)에 눈길을 돌려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대자연의 본질을 내가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대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천역(天易)으로서의  『주역』은 인간의 이러한 인식경계를 벗어난다. 천역(天易)으로서의  『주역』을 서술하기에 앞서, 인간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자연에 대한 인식의 범주가 달라졌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론의 경계를 넓히고자 한다.

 

2.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범주의 변화

 

  인간은 ʻ신의 피조물ʼ로서 혹은 ʻ신의 대행자ʼ로서 혹은 그 자체의 ʻ완전 존재자ʼ로서 대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회를 형성하여 왔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대한 영원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치관에 구속되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언제나 인간은 살아있는 그 상황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부 사람들은 속세를 벗어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인식의 경계를 허물고자 노력하여 왔다.

 

  우리는 인류역사를 고대사회와 중세사회, 근대사회 그리고 현대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다가오는 사회는 미래사회이다. 미래사회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가 형성해 나가야 할 사회이기에 일단 논외로 하고, 지나온 인류사를 돌아보건대,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시대적인 구분을 하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고대사회의 통합이성체계 :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의 종합 인식

 

  고대사회의 특징은 인간이 대자연속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 자연과 융화하거나 투쟁을 통하여 인간사회를 구축하는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은 대자연을 사유하는 종합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만물에 정령이 있다는 만물정령사상은 이 고대사회를 대표하는 가치관이었다.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 각각의 용어로 구사되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이 자연과 호흡하면서 때로는 자연을 극복하는 시기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시기에는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이라는 종합 인식을 하고 있었고, 인간의 사유능력에 있어서도 하늘과 땅과 사람을 생각하는 인식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서양의 대표적인 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인식체계인 이성(理性)ʻ명상 이성ʼʻ도구 이성ʼ으로 구분하여, 이 두 가지 이성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 하였다. 그에게 있어 ʻ도구 이성(道具 理性)ʼ은 인간의 육체라는 경계에서 나오는 감각도구, 즉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수렴되어 판단되어지는 인식체계를 말한다. 한편 ʻ명상 이성(冥想 理性)ʼ은 인간이 대자연과 조물주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인식체계로서 통합이성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였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노자』·장자』·역경』·황제내경』 등 동양 고전의 기본바탕에는 천지인(天地人) 삼합(三合)이라는 종합 인식론이 내재되어 있다.

 

중세사회의 이원 구조 : 도구 이성과 명상 이성의 분리

 

  한편 국가의 기본 틀이 정형화되기 시작한 중세사회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사회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계급화된 수직사회가 틀을 잡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사회의 기본 특징은 봉건계급사회(封建階級社會)라는 점이다. 이러한 수직구도의 기본 틀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ʻ신의 피조물ʼ이란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왕()은 신으로부터 그 권한을 받아야 하고(王權神授說), 신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왕은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최고통치자로서의 권한과 권력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틀을 기초로 하여 인간사회는 귀족과 평민 혹은 노예라는 계급질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중세사회의 공통적인 인식구조는 대자연의 원리세계가 인간사회(人間社會)와 신계(神界)로 이원화(二元化)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세속의 인간사회와 신의 섭리를 향유하는 종교세계가 이원화되어 각각의 가치체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관념에서 인간의 인식능력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이른바 인간 육체의 감각기관에서 나오는 이성체계(도구 이성)와 신과 대자연을 인식하는 통합이성(명상 이성)체계가 세속세계와 종교세계에 따라 이원화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속인은 도구 이성만을 향유할 수 있으며, 명상 이성은 오로지 성직자들에게만 고유한 인식체계로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인간의 본질에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명상(冥想) 이성(理性)을 향유하는 것은 성직자(聖職者)권한이니 성직(聖職)의 세습을 통한 성직자 집단이 있게 되었고, 세속사회에서는 왕권의 세습을 통한 특권계층화가 사회질서의 기본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에서 평범한 인간은 원래부터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주요 속성 가운데 하나인 신과 대자연을 사유할 수 있는 명상 이성을 박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사회에 드리워진 계급화 된 차별구조를 너무나 확연히 알고 있으며(대표적인 남녀차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중세유럽에서 자행되어 왔던 ʻ마녀사냥ʼ의 실상을 돌이켜 보게 된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계급에 따라 구분되었기에, 중세유럽에서 신과 대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오로지 성직자들의 전유물로 되었고, 평범한 인간이 영적(靈的) 경험을 한다거나 새로운 종교적 인식을 한다거나 심지어는 성경(聖經)을 소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중대 범죄자로 취급되어 화형(火刑)에 처하는 ʻ마녀사냥ʼ이 유럽 전역에서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의 계급질서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단순히 말한다면 신과 인간사회의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권한은 지배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동양에 있어서도 글자를 터득하고 이치를 공부할 수 있는 계층이 지배계급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즉 중세사회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명상(冥想) 이성(理性)은 버리고 도구(道具) 이성(理性)만 향유해야 했다.

 

근대사회의 특징 : 도구 이성을 중심으로 한 평등사회

 

  중세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회질서체계가 계급화 된 수직구도에서 평등화 된 수평구도로 전환되었다는 점에 있다. 중세에 종교사회의 지배를 받았던 세속사회는 종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인간중심의 평등사회가 형성되었다. 종교집단이 세속사회를 지배하는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세속사회는 종교집단에 대한 존중을 약속함으로써 이른바 ʻ정교분리(政敎分離)원칙ʼ이 중요한 사회원리로 되었다.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인간사회는 인간 중심의 평등질서로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나 같은 인식체계 즉 도구(道具) 이성(理性)을 구비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되었다. 따라서 근대사회는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명상(冥想) 이성(理性)을 포함한 통합 이성체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명상 이성은 성직자의 고유영역으로 남아 있으면서, 다만 인간에게 부여된 도구 이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인간중심의 사회를 구축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에 서양 유럽에서는 인문주의(人文主義)와 르네상스 등 인간중심의 사회로 전환되었고, 인간이 물질세계를 인식하는 주요 통로인 도구(道具) 이성(理性)을 적극 활용하게 되면서 오늘날 현대 과학문명이 이루어지는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것은 인간사회와 대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도구 이성을 활용하여 물질문명을 이루면서 지구라는 자연을 정복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국제정치에 있어서는 이른바 식민지제국주의가 건설되는 중대한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신()이 목자(牧者)에게 양()을 잘 이끌라고 했건만, 신을 망각한 목자는 양을 정복하고 종으로 부리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의 복합 구조 : 물질중심의 가치관과 정신 이념의 혼돈

 

  물질세계만을 인식하는 도구 이성으로 형성된 근대사회는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지구라는 대자연의 존재를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 왔으며, 이는 결국 세계의 정복과 인간의 정복이라는 투쟁의 소용돌이로 몰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현대인류에게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하게 되었고, 학문의 영역에서도 도구(道具) 이성(理性) 중심의 인간관(人間觀)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학문의 기본 틀은 여전히 근대의 도구 이성만을 전제로 구축되어 왔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인간이 학문으로 다루어야 할 영역이 아닌 것으로 되어 왔다.

 

  우리에게 낯익은 용어중의 하나가 ʻ비과학적(非科學的)ʼ이라는 용어이다. 이것은 인간의 도구 이성을 통한 경험칙에서 인정이 되지 않으면 비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진실성이 부인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어쩌면 철저하게 근대사회보다 더 물질적인 면으로 치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전파망원경으로 우주를 들여다보고 전자현미경으로 극소의 물질세계를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역시 인간의 도구 이성 즉,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라는 감각기관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망원경과 현미경이라는 도구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현대과학의 한계가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다고 하여 혹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마땅히 존재하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전통적으로 동양의 직관(直觀) 인식(認識)은 통합 인식체계로서 도구를 통한 것이 아닌, 굳이 표현하자면 명상(冥想) 이성(理性)체계였다. 인간이란 존재에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었으나 중세 관념에서부터 상실되어 왔던 명상(冥想) 이성을 다시 근본적으로 회복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인간을 더욱 더 근시안적(近視眼的)인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천문학과 물리학 등의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와 세상을 인식하는 가치관이 그 어느 때보다도 넓어진 것 같지만, 사실 현대인류가 보는 것은 신문지상에서 펼쳐지는 각색된 세상 이야기와 인터넷 전산망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전자파의 조합을 보고 있는 것이다. 더욱 더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이기에 현대인의 앞날에 대한 희망은 더욱더 혼돈에 이르고 있다.

 

3. 천역(天易)은 통합 이성체계로 접근해야 한다

 

  따라서 대자연의 원리를 드리우고 있는 천역(天易)은 도구 이성을 통한 과학적인 인식과 아울러 명상 이성을 통한 통합 인식으로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신을 믿건 안 믿건, 항상 무언지 모를 경외감이 우리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가청(可聽)영역에서 벗어난 소리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역』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ʻ대자연의 원리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자연을 드리우고 있는 『주역』의 세계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주역』은 특정 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모든 신을 아우른다. 『주역』은 특정 인류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모든 인류를 아우른다.  『주역』은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ʻ천역(天易)ʼ이라고 한다.

 

 

 신성수, 주역통해(대학서림, 2005), 1824; 신성수, 현대주역학개론(대학서림, 2007), 2941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