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화공존과 소통

노자(老子)의 이상국가론과 평화공존론

돈호인 2014. 11. 28. 18:47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동물(動物)이다. 동물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동물 중에서 지능이 가장 발달한 인간은 오늘날의 문명세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현대 문명의 이면에는 동물속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인간세계의 참모습이 있다. 성욕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에서부터 현세적 권력과 금력을 추구하는 욕구, 특정 개인을 숭배하는 특정 집단의 배타적 권력을 확보하려는 욕구, 끊임없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는 욕구 등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현대사회의 실상은 문명의 탈을 쓴 동물의 세계와 다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발산되는 욕구는 인간 개개인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조직과 조직,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 등 모든 관계망에서 갈등과 충돌을 야기하게 된다.

 

  과연 현대 인류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다양한 가치와 이념 및 종교관이 혼재하는 이 세계에서 모두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공존(共存)’이라는 실존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라는 숭고한 종교정신도 그 실질은 모든 존재의 공존(共存)에 있으며,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국제사회가 지향하는 모든 이념과 가치도 그 실질은 국가와 개인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공존에 있으며, 다국적기업이나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자 하는 것도 모든 존재의 공존에 그 실질적 의미가 있으며, 지구환경의 위기에서 나오는 인류의 대응과 협력 또한 현대 인류의 공존에 그 실질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지성, 인류가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지성은 바로 공존의 정신이 아닌가? 그러나 문명은 계속 발달해도 인류의 지성은 여전히 동물적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도가(道家)의 창시자인 노자(老子)는 자연(自然)한 도()를 구현하기 위한 현상세계의 이상사회를 피력하였는데, 그의 이상국가론과 평화공존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이상국가론 : 소국과민(小國寡民)

(김석진 · 신성수, 주역으로 보는 도덕경, 대학서림, 2005, 294297.)

 

도가(道家)의 이상국가론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적 근거 가운데 하나로는 현행본 도덕경(道德經)80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 수 있다.

 

小國寡民하라. 使有什佰之器라도 而不用하며, 使民重死하여 而不遠徙하라. 雖有舟輿無所乘之하며 雖有甲兵이나 無所陳之리라. 使人復結繩而用之하라. 甘其食하고 美其服하며 安其居하고 樂其俗하여 隣國相望하며 鷄犬之聲相聞하되 民至老死토록 不相往來리라.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을 적게 하라. 열 사람 백 사람 몫을 하는 기물이 있더라도 이를 사용하지 않게 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죽음을 중하게 여겨 멀리 떠나지 않게 하라.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타는 바가 없으며,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으나 그것을 늘어놓는 바가 없을 것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다시 노(새끼)를 묶어 그것을 (약속의 표시로) 사용하게 하라. 그 음식을 달게 먹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입고,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그 풍속을 즐겁게 하여, 이웃한 나라가 서로 바라보며,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이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도덕경전체를 통해 노자가 말해 온 무사(無事), 무위(無爲), 무욕(無欲)의 도를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국가관을 피력하고 있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가장 이상적인 세계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노자의 핵심사상 가운데 일관된 하나는 강하고 크고 굳셈이라는 것은 곧 멸망을 앞두고 있는 것이고, 약하고 부드럽고 작은 것이 곧 항구한 자연의 도와 같이할 수 있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사회가 자연의 도에 일치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주장한다.

 

  인류역사는 항상 자연의 도에 거슬러 나라의 영토가 넓어지고, 국력이 강해지고, 천하 백성이 많아지는 사회를 꿈꿔 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상은 항상 큰 원망과 작은 원망을 낳고 낳아 인류사회를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였다. 자연의 도를 실현하며 도에 일치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어야 한다. 그래서 열 사람 백 사람 몫을 하는 문명한 기구가 있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해야 한다. 도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편해지고자 만들어 내는 온갖 문명의 이기(利器)가 정작 자연과 도를 파괴하는 흉기(凶器)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혜로운 자가 많이 나와서 천하를 통일하고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온갖 제도와 법을 만들어왔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국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 왔다. 그러니 백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더욱 더 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뛰어난 지혜로 만들어진 온갖 제도와 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자연에 순응하여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된다. 그러면 억압을 피해 먼 곳으로 옮기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 비록 배나 수레가 있더라도 그것을 타는 바가 없게 된다. 백성은 자연에 순응하여 천명(天命)을 알려고 노력하고 나라는 커지고 강해지려고 하지 않으니, 비록 갑옷과 병기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펼쳐놓아 사용할 이유가 없어진다.

 

  온갖 간교한 지혜가 난무하는 세상에 백성을 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순일무잡(純一無雜)한 마음을 지니게 해야 한다. 그러니 간교한 지혜로 가득 찬 문서와 글보다는 다시 옛날처럼 노끈을 묶어 약속을 맺는 것(結繩)을 사용하는 소박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자연이 베풀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지금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지금 있는 그 거처를 편안히 하고, 지금의 풍속을 즐겁게 하면,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이 되겠는가?

 

  이렇게 되면 작은 나라 적은 백성들로 이루어진 이 사회에서, 이웃하는 나라들이 서로 바라보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도록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도, 서로가 서로를 침탈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이상세계를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높다고 자처하는 자나 낮다고 자처하는 자나, 드러나지 않은 성인이나 드러난 성인이나, 모두가 도를 추구하는 본성으로 돌아간다면 충분히 가능한 세계일 것이다. 21세기 현대문명을 다시금 돌아봐야 한다.

 

. 평화공존론 大者 宜爲下

(김석진 · 신성수, 주역으로 보는 도덕경, 대학서림, 2005, 226231.)

 

현행본 도덕경(道德經)61장에는 국제관계에서 대국(大國)과 소국(小國)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大國者下流天下之交天下之牝이니라. 常以靜으로 勝牡하고 以靜으로 爲下大國以下小國하면 則取小國하고 小國以下大國하면 則取大國이니라 或下以取하며 或下而取니라 大國不過欲兼畜人이요 小國不過欲入事人이니 夫兩者各得其所欲일새 大者宜爲下니라.

큰 나라라는 것은 아래로 흐르니 천하의 사귐이요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가 된다. 그러므로 대국이 소국에 겸하하면 곧 소국을 취하고, 소국이 대국에 겸하하면 곧 대국을 취한다. 그러므로 혹 겸하함으로써 취하고, 혹 아래에 처하여 취한다. 대국은 지나치게 겸하여 사람을 기르고자 하지 않고, 소국은 지나치게 들어가 사람을 섬기고자 하지 않으니, 무릇 두 가지는 각각 그 하고자하는 바를 얻기 때문에, 대국은 마땅히 겸하해야 한다.

 

  이 장에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 처하여야 할 이치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국제관계라고나 할까.

 

  진정 큰 나라는 큰 만큼 아래에 처하니 천하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고, 천하의 모든 나라(수컷)가 모여드는 암컷이 된다. 자연의 이치를 보건대, 암컷은 항상 고요한 덕으로 수컷을 받아들인다. 즉 고요함으로 수컷을 받아들여 수컷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도 고요함의 본성을 잃지 않고 항상 아래에 처한다.

 

  이러한 이치로 나라와 나라 사이를 보면, 큰 나라가 겸손하게 아래에 처하면 작은 나라들이 큰 나라의 덕에 감화되어 모여들게 되니, 결국 큰 나라는 천하를 취하게 된다. 한편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역시 겸손하게 아래에 처하면 큰 나라가 함부로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큰 나라를 취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큰 나라는 큰 나라대로 겸손하게 하면 천하를 취할 수 있고,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대로 겸손하면 천하를 취할 수 있다. 이것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천하를 취하는 묘책이다. 바로 21세기 현대 국제사회에서 국가들 간의 평화공존을 이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면 큰 나라가 큰 나라로서의 덕(겸손)을 지키고, 작은 나라가 작은 나라로서의 덕(겸손)을 지키는 방법은 또한 무엇인가. 큰 나라는 크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병합하여 많은 사람을 기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큰 나라가 크다는 이유로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많은 사람을 기르려고 한다면, 이는 겸손의 덕을 잃은 것이다. 한편 작은 나라는 작다는 이유로 큰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 사람들을 지나치게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작은 나라가 작다는 이유로 큰 나라를 지나치게 섬기려고 한다면 이는 또한 그 덕을 잃은 것이 된다.

 

  이 두 가지, 즉 큰 나라는 많은 사람을 기르려고 하지 않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지나치게 섬기려고 하지 않는 것을 통해 큰 나라는 큰 나라대로 작은 나라는 작은 나라대로 하고자 하는 바를 저절로 얻게 된다. 큰 나라가 지녀야 할 도를 말한다면, 마땅히 겸손하게 아래에 처하여 천하를 사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