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를 통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구축한 대표자이다. 철학의 대표적인 범주인 존재론과 인식론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각’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생각’은 ‘생각’을 낳아 철학적 사유의 수많은 갈래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생각’의 근원을 보고자 하면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생각’을 어떻게 정의하든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은 궁극적 생명력인 그 무엇이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키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생각’을 뇌의 물리적 작용으로 보든 정신계의 작용으로 보든 ‘생각’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상상력’으로 나아가고, 그 상상력은 인간이 존재하는 현상계를 변화시키는 데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창조적 사고와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면서 ‘상상력을 학습하는 13가지 생각도구’를 제시하는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은 철학적 본질론도 아니고 종교적 깨달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상상력’을 발현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현상세계를 창조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상상력’을 위한 13가지 생각도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아래 내용은 미시건 주립대학 생리학과 교수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Robert Root-Bernstein)과 그의 부인이자 역사학자인 미셀 루트번스타인(Michèle Root-Bernstein)이 협력하여 지은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박종성 옮김, 에코의서재, 2007)에서 ‘상상력을 학습하는 13가지 학습도구’(33∼54쪽)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임)
역사 속에서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은 실재와 환상을 결합하기 위해 13가지 생각의 도구들을 이용했다. 이 도구들은 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그리고 통합이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처음에는 관찰을 통해 습득된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들이다. 이런 느낌과 감각을 다시 불러내거나 어떤 심상으로 만들어 머릿속에 떠올리는 능력이 형상화이다.
그런데 이 감각적 경험과 감각적 형상은 너무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창조적인 사람들은 필수적인 생각도구로서 추상화를 활용한다. 피카소 같은 화가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건 헤밍웨이 같은 작가건 간에 그들은 복잡한 사물들을 단순한 몇 가지 원칙들로 줄여나갔는데, 추상화는 바로 이것을 일컫는다.
추상화를 통한 단순화는 자주 패턴화와 짝을 이룬다. 이 패턴화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패턴인식은 자연의 법칙과 수학의 구조를 발견하는 일뿐만 아니라 언어와 춤, 음악의 운율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림의 경우 화가의 형식적 의도를 감지하는 일과 관련되어 잇다. 패턴을 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첫 걸음이다. 둘째로 패턴형성인데, 음악이나 미술, 공학, 혹은 무용, 그 어떤 분야이건 간에 기발한 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은 단순한 요소들을 예상외의 방법으로 조합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보다 흥미있는 것은 패턴이 스스로 패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게다가 패턴 속에 들어 있는 패턴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유추로 이어진다. 명백히 달라 보이는 두 개의 사물이 중요한 특질과 기능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과 예술작품, 불후의 과학이론, 공학적 발명을 이루어내는 일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생각도구들은 언어와 상징 이전의 것이다. 바로 몸으로 생각하기가 정확히 그런 것인데, 생각이란 것이 먼저 감각과 근육, 힘줄과 피부를 타고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말과 공식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수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의 덩어리가 솟아오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몸의 감각과 근육의 움직임, 감정들은 보다 정련된 사고의 단계로 뛰어오르게 하는 도약대 역할을 한다. 운동선수와 음악가는 동작의 느낌을 상상하고, 물리학자와 미술가는 몸 안에서 전자나 나무의 움직임과 긴장을 감지한다. 감정이입은 몸으로 생각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많은 창조적인 사람들은 뭔가를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잊는다고 말한다. ‘나’를 잊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생각도구 가운데 공간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다차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차원적 사고란 어떤 사물을 평면으로부터 끌어내어 3차원 이상의 세계로, 지구로부터 우주로, 시간을 통과하여 심지어 다른 세계로 옮길 수도 있는 상상력을 일컫는다. 이것은 생각도구들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도구지만 공학, 조작, 시각예술, 의학, 수학, 천문학분야에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평면적 차원의 ‘그림’을 보다 높은 차원 속으로 옮겨 해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개괄한 생각도구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도 다른 것들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몸으로 생각하기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유추는 패턴인식과 패턴형성에 의지하고 있다. 패턴화는 다시 관찰에 의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고 실습하는 과정에서는 각각의 생각도구들을 분리할 수 있다.
그 밖의 생각도구들은 보다 높은 단계의 것들로서, 기본적인 생각도구들을 기반으로 통합한 것들이다. 어떤 대상과 개념을 모형으로 만드는 것은 다차원적 사고, 추상화, 유추, 손재주의 결합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앞세대의 작가들이 남긴 전범을 보면서 장르의 패턴을 익힌다. 화가나 조각가들은 대형작품을 제작하는 준비단계로 스케치를 하거나 작은 모형을 만든다. 무용수들은 일반 사람들의 동작에서 안무를 뽑아낸다. 의사들은 특수한 인체모형을 놓고 시술과정을 배운다. 엔지니어들은 작업모형을 다루면서 설계를 검토한다.
놀이는 또 다른 통합적인 생각도구로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역할 연기와 모형 만들기 등의 생각도구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놀이는 작업에 즐거움을 불어넣어주며 관습적인 절차나 목표, 게임의 법칙 등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기존 과학과 예술, 기술의 한계에 장난스럽게 도전한다는 것은 기발한 생각들이 탄생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변형은 하나의 생각도구와 다른 생각도구 사이, 그리고 생각의 도구들과 공식적인 의사전달언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환과정이다. 느낌에서 의사 전달로 이행하는 데에는 거쳐야 할 일련의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문제를 이미지나 모형으로 변환하고, 면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패턴을 찾아내고, 패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추상화하여 그것을 다시 모형으로 만든다. 그런 다음 감정이입과 역할 연기를 통해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하며 ‘놀아’본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장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언어’를 찾는다. 변형은 나머지 생각도구들을 한데 엮어서 하나로 기능하는 전체로 만들고 각각의 기술을 다른 기술들과 상호 접합시킨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통합은 지금까지 설명한 생각도구들의 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해한다(umderstanding)는 것은 항상 통합적이며 많은 경험의 방식들을 결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통합에는 두 개의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 하나는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으로, 이는 동시에 복수적으로 감각하는 것을 일컫는 신경학적 · 예술론적 용어다. 어떤 소리는 색채를 유발하며 어떤 맛은 촉각이나 기억을 불러낸다. 통합은 지식의 통합을 전제로 한다. 통합된 지식 안에서는 관찰, 형상화, 감정이입과 기타 생각도구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한다. 이 작용은 앞서 설명한 변형의 경우에서처럼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며 기억, 지식, 상상, 느낌 등 모든 것들이 따로따로가 아닌 전체로, 그리고 몸을 통해서 이해된다. 우리는 이것을 몸과 마음, 감각과 분별력을 이어주는 ‘통합적 이해(unified understanding)’, 혹은 종합지(綜合知, synosi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생각도구를 가르치는 일의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시스템이란 것은 우리들의 인지적 · 창조적 이해를 구현하고 있어야 한다. 창조성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사회라면 교육을 통하여 창조성을 키워낼 수 있다. 지식은 점점 더 빠르게 파편화되고 있고 진정한 이해는 점점 더 보기 드문 일이 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점점 더 많지만 정작 우리는 그것을 점점 더 적게 이해하고 이용한다. 만일 사회가 ‘통합적 이해’에 이르는 통로를 대중에게 열어주지 않는다면 정보혁명은 쓸모없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에도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생각도구를 가지고 환상과 실재를 통합함으로써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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