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산책/주역의 기본원리

6-1. 선천(先天) 후천(後天)의 개념에 대하여

돈호인 2021. 7. 24. 18:25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라는 용어가 이른바 역학(易學)에서 관용적으로 쓰이게 된 기원은 아마도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그리고 선천팔괘와 후천팔괘를 비교하게 되면서부터 쓰이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선천과 후천의 개념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는 다소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개념 중의 하나는 종교적(宗敎的) 이론에 입각한 것으로 후천(後天)을 내세(來世) 혹은 개벽(開闢)된 이후의 용화세계(龍華世界)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자연의 원리를 연구하는 순수한 입장에서 볼 때, 선천과 후천의 의미에는 대체로 다음의 4가지로 볼 수 있으며, 각각의 의미는 경우에 따라 특정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1. 학리적 개념(學理的 槪念)

 

1) 일원적 이원론(一元的 二元論, 一元論)

 

  선천(先天)이란 구체적인 현상체로 나타나게 하는 근원적 원리로서의 형이상(形而上)을 의미하고, 후천(後天)이란 선천의 이치에 따라 천리가 변화하여 현상천(現象天)을 이루고, 일월(日月)이 운행하고 한서(寒暑)가 교류하며 작용하고 있는 작용적 천문, 즉 형이하(形而下)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선천과 후천이 서로 체용(體用표리(表裏)의 관계가 되고, 일체(一體)의 양면(兩面)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2) 이원론(二元論)

 

  선천의 법도(法度)와 후천의 법도(法度)가 다르다고 보며, 따라서 선천이 후천으로 바뀌면 그 법도도 바뀐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컨대 14계절 중 봄·여름(春夏, 선천)의 법도와 가을·겨울(秋冬, 후천)의 법도는 서로 다른 이치에 의해 운행한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지구가 공전하면서 나타나는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의 기운변화에 있어 양기운이 주도적으로 작용하는 봄·여름의 법도와 음기운이 주도적으로 작용하는 가을·겨울의 법도를 나누어 구별하는 것이다.

 

2. 현상적 개념(現象的 槪念)

 

1) 시간적 선후관(時間的 先後觀)

 

  선천과 후천이란 개념을 단순한 시간적 개념으로 파악하여 지나간 과거(過去)를 선천이라 하고, 다가올 미래(未來)를 후천이라 보는 입장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의 흐름을 통하여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개념,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세 가지 개념 가운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재라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현재란 정지된 상태를 가정하여 사용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사실 정지된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오로지 지나가는 것(과거)과 다가오는 것(미래)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른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지금 이 순간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2) 시기론적 개벽관(時期論的 開闢觀)

 

  이는 우주적 순환의 큰 주기(週期)를 내세워 어느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선천이라 하고 그 이후를 후천이라 하는 입장이다. 대체적으로 종말론적 개벽사상이나 종교관이 이러한 개념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에 지나치게 치중하면 인간의 존재의미와 현실세계를 무시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철학사상이든 종교사상이든 간에 어느 시대에나 후천(유토피아)을 기약하는 사조(思潮)가 있어 왔다. 인간은 항상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기원한다. 그래서 이상적인 사회가 현실로 실현되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그 무엇에다가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후천(後天)이란 인간사회가 만들어가는 미래상(未來像)이라고 본다. 어느 순간에 신(神)이 강림하여 인간사회를 징벌하고 이상사회를 구현한다는 개벽론적 종말관은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고 나약하게 만든다. 또한 어떠한 불가사의한 상황이 도래하여 인간을 심판한다 하더라도 특정 종교(宗敎)를 믿거나 특정 신(神)을 신봉하는 자들만이 이른바 이상세계의 생존자로 된다면, 그 신은 참다운 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자연의 이치(理致)와 마찬가지로 대자연의 신(神)은 공정무사(公正無邪)하다. 어느 특정 부류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 신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긴다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존재가치를 원천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통해 깨닫고 수양하면서 지금 살아있는 인간 존재자가 보다 바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른바 이상적인 후천을 만들어가는 정도(正道)라고 본다.

 

 

※ 신성수, 『주역통해』(대학서림, 2005), 55∼57쪽; 신성수, 『현대주역학개론』(대학서림, 2007), 125∼12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