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의
집안에서나 사회에서나 모든 일은 앞서 행한 사람(조상․선배․선임자)들의 일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 백성을 진작시키고 덕을 길러 일의 마침과 비롯함을 신중하게 하라(振民育德).
괘명과 괘상
외괘가 간산(艮山)☶, 내괘가 손풍(巽風)☴으로 이루어진 괘를 ‘고(蠱)’라고 한다. 산 아래에 바람이 불어오니 일이 생긴 것이다. 일은 항상 시작할 때와 마칠 때가 중요하다. 마치는 것은 선대(先代)의 일이요, 시작하는 것은 당대(當代)의 일이다. 당대의 일을 시작함에 선대의 일을 이어받아 마무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는 선대(先代)로부터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집안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서괘
「서괘전」은 택뢰수괘 다음에 산풍고괘가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以喜隨人者 必有事라 故로 受之以蠱하고
이희수인자 필유사 고 수지이고
기쁨으로써 사람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일이 있다. 그러므로 고괘로 받고
괘사
蠱는 元亨하니 利涉大川이니 先甲三日하며 後甲三日이니라.
고 원형 이섭대천 선갑삼일 후갑삼일
고(蠱)는 크게 형통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로우니, 갑(甲)으로 먼저 삼일을 하며 갑(甲)으로 뒤에 삼일을 한다.
蠱:곡식벌레 고·의심할 고·미혹할 고·일 고 涉:걸어서 건널 섭 甲:첫째 천간 갑
고(蠱)는 선대의 일을 이어서 하는 것이기에 크게 형통하다. 큰일을 하는 것이 이로운데,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그 전후(前後)를 잘 살펴야 한다. 갑(甲)이라는 것은 일이 시작되는 시점을 말한다. 어떤 일이 시작된다는 것은 그 전의 일이 마무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先甲三日’은 그 전의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고, ‘後甲三日’은 일을 새로 시작할 때의 조심스러운 기간을 말한다.
《주역》은 음양(陰陽) 기운의 양상으로 자연변화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고, 또한 음양기운의 변화양상은 세상사의 현실적인 변화에도 부합되고 있다. 세상사의 변화 절도(節度)는 책력(冊曆)으로 나타나고, 모든 일은 그 책력에 기준하여 비롯함을 정하고 있다. 우리 동양권에서 책력을 표기하는 기준은 간지(干支), 즉 60갑자였다. 천간(天干)을 기준으로 할 때 갑(甲)은 일의 시작을 의미한다. 단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사
彖曰 蠱는 剛上而柔下하고 巽而止 蠱라.
단왈 고 강상이유하 손이지 고
蠱 元亨하야 而天下 治也오 利涉大川은 往有事也오
고 원형 이천하 치야 이섭대천 왕유사야
先甲三日後甲三日은 終則有始 天行也라.
선갑삼일후갑삼일 종즉유시 천행야
단전에 말하였다. “고(蠱)는 강(剛)이 위에 하고 유(柔)가 아래하고, 겸손해서 그침이 고(蠱)이다. 고(蠱)가 크게 형통해서 천하가 다스려지고,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는 것은 가서 일이 있는 것이고, ‘갑으로 먼저 삼일을 하고 갑으로 뒤에 삼일을 한다’는 것은 마치면 곧 비롯함이 있음이 하늘의 행함이다.”
巽:겸손할 손 治:다스릴 치 終:마칠 종 始:비롯할 시
택뢰수(澤雷隨)괘와 마찬가지로 산풍고(山風蠱)괘 역시 삼음삼양(三陰三陽)괘이다. 택뢰수괘는 천지비괘에 그 체를 두고 있지만, 산풍고괘는 지천태(地天泰)괘에 체를 두고 있다. 지천태괘에서 초구의 양강(陽剛)이 위로 올라가고 상육의 음유(陰柔)가 아래로 내려오니 태평한 세상에 일이 생겼고, 괘덕으로 보면 내괘 손☴으로 겸손하고 외괘 간☶으로 그치는 것이 고(蠱)이다.
태평한 세상에서는 크게 형통해서, 천하의 일을 잘 다스려야 한다.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는 것은 가서 해야 할 큰 일이 있다는 것이고, ‘先甲三日後甲三日’은 천도의 운행이 마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하면서 춘하추동 사시의 변화를 일으키고, 지구가 자전하면서 낮과 밤의 교차가 끊임없이 일어나듯이, 마치면 곧 비롯함이 있는 것이다. 인생사의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이다.
괘상사
象曰 山下有風이 蠱니 君子 以하야 振民하며 育德하나니라.
상왈 산하유풍 고 군자 이 진민 육덕
상전에 말하였다. “산 아래에 바람이 있는 것이 고(蠱)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백성을 진작시키며 덕을 기른다.”
風:바람 풍 振:떨칠 진 育:기를 육
고괘(蠱卦)는 산 아래에 바람이 부는 상이다. 이러한 상을 보고 군자는 내괘 손풍(巽風)☴으로 백성을 고무진작(鼓舞振作)시키고 외괘 간산(艮山)☶으로 덕을 기른다. 일을 해 나가는 것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따르는 백성(무리)들을 흥기시켜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한 덕을 길러야 모든 일의 결과가 좋게 된다.
효사 및 효상사
初六은 幹父之蠱니 有子면 考 无咎하리니 厲하야아 終吉이리라.
초륙 간부지고 유자 고 무구 려 종길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니, 자식이 있으면 죽은 아버지가 허물이 없을 것이니, 위태롭게 여겨야 마침내 길할 것이다.
幹:줄기 간·주장할 간 考:죽은 아비 고 厲:위태할 려
초육은 양 자리에 음이 있고 응하는 육사도 같은 음이니, 사실 자식이 없는 상이다. 선대 아버지의 일을 맡아 일을 해야 하는데, 만일 자식이 있으면 아버지의 일을 잘 처리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 그러나 위가 부당하고 중도 얻지 못한 상황이니, 위태롭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해야 마침내 길하게 된다.
‘고(考)’는 죽은 아버지를 의미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下 第二」에 다음의 글이 있다.
천자가 죽음을 붕(崩)이라 하고, 제후가 죽음을 훙(薨)이라 하고, 대부가 죽음을 졸(卒)이라 하고, 사(士)가 죽음을 불록(不祿)이라 하고, 서인이 죽음을 사(死)라고 한다. 사람이 죽어 상에 있을 때는 시(尸)라 하고, 관에 있을 때는 구(柩)라고 한다. 날짐승이 죽음을 강(降)이라 하고, 들짐승이 죽음을 지(漬)라 하고, 도적이 죽음을 병(兵)이라 한다. 제사를 지냄에 왕의 아버지를 황조고(皇祖考)라 하고, 왕의 어머니를 황조비(皇祖妣)라 하고, 아버지를 황고(皇考)라 하고, 어머니를 황비(皇妣)라 하고, 남편을 황벽(皇辟)이라 한다. 살아서는 부(父)라 하고, 모(母)라 하고, 처(妻)라 하며, 죽어서는 고(考)라 하고, 비(妣)라 하고, 빈(嬪)이라 한다. 오래 살다 죽음을 졸(卒)이라 하고, 단명함을 불록(不祿)이라 한다.
(天子死曰崩이요 諸侯曰薨이요 大夫曰卒이요 士曰不祿이요 庶人曰死라 하니라. 在牀曰尸요 在棺曰柩라 하니라. 羽鳥曰降이요 四足曰漬이요 死寇曰兵이라 하니라. 祭에 王父曰皇祖考요 王母曰皇祖妣요 父曰皇考요 母曰皇妣요 夫曰皇辟이라 하니라. 生曰父요 曰母요 曰妻라 하며 死曰考요 曰妣요 曰嬪이라 하니라. 壽考曰卒이요 短折曰不祿이라 하니라.)
象曰 幹父之蠱는 意承考也라.
상왈 간부지고 의승고야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함은 뜻이 죽은 아버지를 잇는 것이다.”
意:뜻 의 承:이을 승
九二는 幹母之蠱니 不可貞이니라.
구이 간모지고 불가정
구이는 어머니의 일을 주장하니, 가히 곧게 하지만은 못한다.
구이는 음 자리에 양으로 있지만, 내괘에서 중도를 얻은 자리이다. 구이가 음 자리에 있고 응하는 자리도 육오로 음(陰)이니, 어머니의 일을 맡아 주장한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일이나 어머니의 일이나 모두 선대(先代)의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일을 맡아 주장함에 있어서는 고집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선대의 일이 후대로 내려온 것이지만, 선대(先代) 때와 후대(後代) 때는 상황이 변해 있다. 중도(中道)로 그 상황을 잘 파악하여 융통성 있게 해결하라는 의미이다.
象曰 幹母之蠱는 得中道也라.
상왈 간모지고 득중도야
상전에 말하였다. “어머니의 일을 주장함은 중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九三은 幹父之蠱니 小有悔나 无大咎리라.
구삼 간부지고 소유회 무대구
구삼은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니, 조금 후회가 있으나 크게 허물은 없을 것이다.
悔:뉘우칠 회 咎:허물 구
구삼은 양 자리에 양으로 있고 중을 얻지 못하였다. 응하는 자리가 상구로 같은 양이니 아버지의 일을 맡아 주장하는 격이다. 그런데 중도를 얻지 못해 지나치게 일을 처리할 수도 있고, 내호괘가 태☱이니 조금 후회스런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선대의 일을 맡아 주장하는 것이니 큰 허물을 짓는 것은 아니다.
象曰 幹父之蠱는 終无咎也니라.
상왈 간부지고 종무구야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함은 마침내 허물이 없다.”
六四는 裕父之蠱니 往하면 見吝하리라.
육사 유부지고 왕 견린
육사는 아버지의 일을 여유롭게 하니, 가면 인색함을 볼 것이다.
裕:넉넉할 유·늘어질 유·관대할 유 吝:인색할 린
육사는 음자리에 음으로 있어 지나치게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상황이다. 그러니 선대 아버지의 일을 제때에 해결하지 않아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또한 일처리도 정확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적당히 한다. 이렇게 해 나가면 인색하게 된다.
象曰 裕父之蠱는 往앤 未得也라.
상왈 유부지고 왕 미득야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여유롭게 하는 것은 가면 얻지 못한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는데 지지부진하게 적당히 해 가면, 결국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한다.
六五는 幹父之蠱니 用譽리라.
육오 간부지고 용예
육오는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니, 명예로울 것이다.
用:써 용(以) 譽:명예 예·기릴 예
육오는 외괘 간산(艮山)☶에서 중을 지키고 있다. 그야말로 선대 아버지의 일을 중도로 덕이 있게 해결하니, 명예로울 수밖에 없다.
산풍고괘 육오효가 변하면 중풍손(重風巽)괘로 된다. 중도(中道)로 선대의 일을 잘 마무리하니, 새롭게 상황을 고쳐 나갈 수 있다. 《주역》 57번째에 있는 중풍손괘 구오효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九五는 貞이면 吉하야 悔 亡하야 无不利니 无初有終이라. 先庚三日하며 後庚三日이면 吉하리라.
구오는 바르게 하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어져서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처음은 없고 마침은 있다. 경(庚)으로 먼저 삼일하며 경(庚)으로 뒤에 삼일 하면 길할 것이다.
象曰 幹父用譽는 承以德也라.
상왈 간부용예 승이덕야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해서 명예로운 것은 덕으로 잇기 때문이다.”
上九는 不事王侯하고 高尙其事로다.
상구 불사왕후 고상기사
상구는 왕과 제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높이 숭상하도다.
事:섬길 사·일 사 侯:제후 후 尙:숭상할 상
상구는 외괘 간산(艮山)☶의 끝에 있고, 고괘(蠱卦)의 맨 위에 있다. 이러한 상으로 보면, 상구의 일은 세상사와 무관한 산 속의 일이다. 또한 음 자리에 양으로 있고 중도 얻지 못한 상태이니, 선대의 일을 맡아 처리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선대(先代)의 일은 물론 세속사의 왕후(王侯)도 섬기지 않는 상이다. 오로지 세상사와는 다른 그 어떤 일을 높이 숭상한다. 산 속의 일이기에 깨달음의 일(得道)일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세상 사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앞 세대의 일을 순리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서 저마다 자기주장만 펴는 혼탁한 사회상일수도 있다.
象曰 不事王侯는 志可則也라.
상왈 불사왕후 지가칙야
상전에 말하였다. “왕후를 섬기지 않는 것은 뜻이 가히 법할만하다.”
상구가 세속의 왕과 제후를 섬기지 않는 것은, 상구가 가진 뜻이 가히 지켜야 할 법칙이기 때문이다.
※ 수산 신성수, 『주역통해』, 대학서림, 2005, 272∼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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